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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소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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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녜스 소렐은 15세기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공식적인 첫 번째 정부이다. 20세 무렵 샤를 7세에게 소개되어 그의 애첩이 되었으며, 로슈 성을 사저로 하사받았다. 샤를 7세와의 사이에서 세 딸을 낳았으며, 넷째 아이를 임신한 채 쥐미에주 원정에 동행했다가 급사했다. 사인은 처음에는 이질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수은 중독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샤를 7세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사치스러운 생활로 궁정 내에 많은 적을 만들었다. 아녜스 소렐은 다양한 예술 작품에 등장하며, 한국에서는 샤를 7세를 도와 백년전쟁 승리에 기여한 인물로 인식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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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소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녜스 소렐, 젖을 먹이는 마돈나
아녜스 소렐, 젖을 먹이는 마돈나
직업시녀
알려진 이유왕의 정부
개인 정보
출생일1422년
출생지프로망토 (이즈뢰르쉬르크뢰즈), 투렌, 프랑스
사망일1450년 2월 9일 (28세)
사망지쥐미에주, 노르망디, 프랑스
배우자샤를 7세
자녀마리 드 발루아
샤를로트 드 발루아
잔 드 발루아
부모장 소로
카트린 드 메넬레

2. 생애

아녜스 소렐은 병사 장 소렐(Jean Sorel)의 딸로 태어났으나, 정확한 초기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샤를 7세에게 소개될 당시 20세였으며, 나폴리 왕 르네 2세(René d'Anjou)의 아내 이사벨 드 로렌(Isabelle de Lorraine)을 섬기는 시녀였다. 샤를 7세는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아녜스에게 매료되어 애첩으로 삼고, 로슈(Roche) 성을 사저로 주었다.

아녜스는 시농 궁정에서 왕비 마리 당주(Marie d'Anjou)와 불화 없이 지냈으나, 왕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사치스러운 성향을 보여 궁정 내 많은 적을 만들었다.

샤를 7세와 아녜스 사이에는 마리, 샤를로트, 잔느 세 딸이 있었다. 1450년, 넷째 아이를 임신한 채 쥐미에주(Jumièges) 원정에 나선 샤를 7세를 따라갔으나, 급병으로 2월 9일 사망했다. 사인은 이질로 알려졌으나, 현대 연구자들은 수은 중독으로 결론 내렸다.[1][2] 당시 수은은 구충제로 사용되었지만, 살해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루이 11세는 아녜스 사망 4년 전 부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애첩의 영향 아래 있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아녜스를 제거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귀족 자크 쾨르(Jacques Coeur)도 독살범으로 의심받았으나, 궁정에서 쾨르를 추방하기 위한 소문으로 여겨진다. 2005년 화학자 필립 샤를리에(Philippe Charlier)는 유해 조사 결과 수은 중독이 사인임을 확인했지만, 살인 여부는 언급하지 않았다. 15세기에는 수은이 화장품에 첨가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2. 1. 왕실 입궁

1422년경, 아녜스 소렐은 쿠당의 샤틀랭(châtelain) 장 소로(Jean Soreau)와 카트린 드 메뉴네(Catherine de Maignelais)의 딸로 태어났다. 아녜스는 20세 또는 21세 때 샤를 7세에게 소개되었다. 당시 아녜스는 르네 1세의 궁정에서 그의 배우자 로렌 공작부인 이사벨라의 시녀(maid of honour)로 일하고 있었다. 그 후 샤를 7세의 왕비이자 이사벨라의 시누이인 마리 당주의 시녀(lady-in-waiting)로 봉직했다. 아녜스는 곧 샤를 7세의 정부가 되었다.

2. 2. 샤를 7세의 총애

오른쪽 패널, 멜랑 디프티크: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성모와 아기 예수 (장 푸케의 아녜스 소렐 묘사)


국왕 샤를 7세는 아녜스에게 르 슈토 드 록(Château de Loches)을 사적인 거처로 제공했다. 아녜스는 시농의 왕실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그녀와 함께 지내면서 왕은 오랫동안 지속된 우울증에서 벗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는 궁핍한 왕을 설득하여 군대를 결집하고 프랑스 영토에서 잉글랜드 침입자들을 몰아내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아녜스는 왕에게 매우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사치스러운 취향 때문에 궁정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녀는 프랑스 국왕의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첫 번째 왕의 정부(royal mistress)가 되었다.[1]

아녜스는 특히 낮게 파인 드콜테(décolletage) 드레스 유행을 선도하여 궁정에서 스캔들을 일으켰다. 이러한 행동은 모방되기도 하고 경멸받기도 했다. 랭스 대주교 장 쥐베날 데 뤼르생(Jean Juvénal des Ursins)은 "여성의 젖꼭지, 유두 및 가슴이 보이는 앞쪽 개구부(ouvertures de par devant, par lesquelles on voit les tetins, tettes et seing des femmes)"를 바로잡도록 국왕에게 권고했다.

화가 장 푸케는 멜랑 디프티크(Melun Diptych) 그림에 아녜스를 성모 마리아로 묘사하여 궁정에 더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 신성한 지위와는 거리가 먼 국왕의 정부이자 샤를의 사생아들의 어머니를 마리아에 비유한 것에 궁정 신하들은 경악했다.[1]

2. 3. 죽음

1450년, 네 번째 아이를 임신한 채 쥐미에주 전투에 참여한 샤를 7세를 따라갔다가 급병으로 사망했다.[1] 사인은 처음에는 이질로 여겨졌으나, 2005년 프랑스 법의학자 필리프 샤를리에는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1][2] 살해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며, 루이 11세 또는 자크 쾨르가 독살했다는 추측이 있었다.[1] 하지만 루이 11세의 경우 아버지를 반란한 지 4년 만이었고, 자크 쾨르의 경우 그를 프랑스 궁정에서 제거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널리 신빙성이 없다고 여겨진다.[1] 아녜스는 로슈의 생투르 성당에 매장되었고, 심장은 쥐미에주 수도원에 묻혔다.[1]

3. 자녀

샤를 7세와의 사이에서 세 딸을 낳았다.

이름출생사망비고
마리1444년 여름1473년1458년 타이유부르 백작 올리비에 드 코르티비와 결혼
샤를로트1446년1477년1462년 모레브리에 백작 자크 드 브레제(피에르 드 브레제의 아들)와 결혼, 아들 루이 드 브레제, 아네 씨는 디아나 드 푸아티에와 결혼
잔느1448년1467년1461년 상세르 백작 앙투안 드 부이유와 결혼


4. 유산

장 푸케(Jean Fouquet)의 '성모자'를 본뜬 16세기 초상화


아녜스 소렐은 볼테르(Voltaire)의 시 ''라 푸셀(La Pucelle)''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2]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딴 1836년 오페라의 주제이기도 하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오페라 두 편에서도 샤를 7세와 함께 그녀를 묘사하고 있는데, 표트르 차이콥스키(Pyotr Tchaikovsky)의 ''오를레앙의 처녀''와 세자르 쿠이(César Cui)의 ''사라센인''이 그것이다.[3][4]

그녀는 또한 주디 시카고(Judy Chicago)의 설치 작품 ''만찬''에 등장하는 인물이며, ''유산 바닥''에 있는 999개의 이름 중 하나로 표현되어 있다. 아녜스 소렐 보디스, 아녜스 소렐 코르사주 등 그녀의 이름을 딴 두 가지 의복과, "공주풍" 의상 스타일인 아녜스 소렐 스타일도 있다.

  • 15세기 화가 장 푸케(Jean Fouquet)가 그린 성모자상의 모델이 되었다.
  •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Пётр Ильич Чайковский)가 작곡한 오페라 《오를레앙의 처녀》(Орлеанская дева)
  • 체사레 퀴이(César Cui)가 작곡한 오페라 《사라센》(Саладин)
  • 장 아누이(Jean Anouilh)가 작가인 희곡 《종달새》(L'Alouette)

참조

[1] 서적 Sex With Kings: 500 Years of Adultery, Power, Rivalry, and Revenge HarperCollins
[2] 학술지 Voltaire's Saint Joan: A Burlesque on Saints and Chastity
[3] 웹사이트 Tchaikovsky - The Maid of Orleans http://www.classical[...] 2020-02-06
[4] 웹사이트 The Saracen http://opera.stanfor[...] Stanford University 202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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